떡의 기원은 연대를 명확하게 밝히기 어렵지만 곡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고려해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 중기부터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원시 농경이 시작되었고 벼농사에 앞서 피․ 수수․ 기장 등의 잡곡농사가 먼저 시작되었는데 토기 및 상용 도구의 사용으로 추정해 볼 때 조리형태는 죽, 떡, 밥의 순서로 발달하였습니다. 조리기구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신석기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가, 청동기시대에는 시루 및 민무늬토기가 사용되었고,솥은 청동기, 초기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사용되었는데, 밥은 호화 과정의 특성상 상고시대의 연질의 토기에서는 온전하게 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의 낱알이 이 당시의 토기보다 단단하여 쉽게 밥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곡물의 도정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여 가루가 섞였을 경우 범벅처럼 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토기에 곡물, 기타 채소나 부재료를 익히기 위해 넣는 물의 양에 따라 삶아지는 정도가 다르고 이때의 삶는 조리는 된 죽이나 묽은 죽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잡곡이 주가 되는 잡곡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초기 농경에서 수확한 곡물은 갈돌을 이용하여 탈 곡을 하였을 것이며, 이 과정에서 얻게 된 굵게 갈아진 곡물가루를 호화시켜 먹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불에 달군 돌판 위에 동물의 사냥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동물성 기름을 이용해 지지거나 구운 떡이 원시적인 초기단계의 떡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지거나 굽는 방법은 다른 특별한 조리 용구 없이도 만들어질 수 있으므로 떡의 가장 처음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의 떡으로 토기를 이용하여 삶는 떡을 생각할 수 있는데 곡물가루를 반죽하여 삶아 내어 먹는 방법은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이런 방식으로 만들게 된 떡은 원시적 경단의 형태를 띠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의 떡은 농경이 정착되고 떡을 만들 수 있는 조리기구인 토기 시루가 발굴되는 청동기부터 시작되어, 삶고 지지는 조리 기구의 발전과 더불어 영고(迎鼓), 무천(舞天), 동맹(東盟)등의 제천의식은 물론 통과의례, 제례, 절식 및 상용음식으로서 그 상징적 의미를 더해가며 전통 생활 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여 왔다. 벼농사의 정착은 식생활의 안정을 가져왔고 또한 주, 부식의 분리 개념이 싹트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잡곡 떡에서 쌀 위주의 떡을 만들게 됨으로써 떡의 다양화를 가져왔고, 또 농경사회에 있어 제천 의식은 필연적이었기에 그에 따라 떡이 자연스럽게 의례용 음식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문헌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상고시대의 떡을 정확히 헤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삼국시대의 떡문화는 농경이 확립되고 벼농사 중심의 농경경제를 이룬 시기에 이어 통일신라시대가 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쌀을 중심으로 한 곡물 농업이 크게 확대됨에 따라 떡도 한층 더 발달하게 됩니다. 특히, 무쇠 솥이 널리 보급돼 면서 밥이 일반화되고 상용 음식으로 정착되면서 일상식(日常食)이었던 떡은 자연스레 단독 음식, 명절 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 종류와 조리법이 고급화되고 다양해졌다. 고려시대의 떡 문화는 건국 초기부터 불교가 장려된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육식이 절제되고,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변하면서 차를 즐기는 음다(飮茶) 풍속이 성행했고, 또한 숭불 정책에 따른 연등회, 팔관회 등의 각종 의례에 떡이 빈번히 사용되면서 한과와 떡 문화가 확대되어 일반화된 떡의 종류가 160여 종으로 늘어났으며, 권농 정책에 힘입어 양식이 전보다 풍부해지면서 곡물 중심의 음식 문화가 더욱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 말의 지식인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을 보면 일상에서 먹었던 떡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유두일(流頭日)에 먹었던 수단을 씹을 때 느껴지는 청량함을 표현한 대목이 있는가 하면, 차수숫가루를 반죽하여 소를 넣는 수수전병에 대해 ‘떡의 향기는 좋지만 지져먹는 전병은 소화되기 어렵다’는 내용을 읊은 시도 등장하게 됩니다. 조선시대의 떡문화로 우리 식생활 문화의 전통이 재정비되고, 현재와 비슷한 한국 음식이 완성된 시기이다. 초기부터 토산약재와 의학 연구가 활발했기 때문에 쑥․승검초 가루․복령․대추․감․잣․밤․호박․꿀․송기․석이 등의 약재를 조화롭게 배합하여 약식동원(藥食同原) 혹은 약식 동의(藥食同醫) 실체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따라서 과학기술이 신장되고 의약학(醫藥學)이 발달하는 환경에서 농업기술이 증진되는 것은 물론, 식생활에 대한 과학적인 의식 또한 제고될 수 있었습니다. 금속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농서(農書)가 널리 보급되었고, 이는 곡물과 채소류의 재배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농산물 산출의 증진을 도모하였습니다. 그 결과 떡을 할 수 있는 재료가 풍부해지면서 떡의 종류, 맛과 모양이 한층 다양하고 섬세하며 고급화되어 떡의 종류가 약 200가지가 넘게 발달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만들어진 떡은 의례행사에는 물론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에 필수적인 음식이 되었고, 사람들이 명절이나 절기마다 특색 있는 떡을 만들어 먹으면서 전통 음식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뚜렷하게 나타나는 4계절과 농경사회의 특징을 반영하여 나눈 24절기에 맞춘 농경의례, 민간신앙을 배경으로 한 절식 풍속(정월 설날, 상원 절식, 이월 삭일, 단오, 유두, 추석, 10월 상달, 납 향)에 따라 나름대로의 특징과 의미를 가진 떡이 발달했고, 사람들은 때에 맞추어 알맞은 떡을 해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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